식물을 어루만지고 기록하며 흘러가는 계절을 걷는 법
식물을 어루만지고 기록하며 흘러가는 계절을 걷는 법
식물을 어루만지고 기록하며 흘러가는 계절을 걷는 법
요즘 일주일에 5일은 숲으로 출근하고 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희망일자리 사업에 지원해 단기간 근무를 하고 있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을 1지망으로 넣고 가고 싶은 곳인 에코뮤지엄을 2지망으로 넣었는데
에코뮤지엄 사업으로 배정되어 “아, 이제 식물하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구나” 싶더라고요.
덕분에 마음껏 식물을 만나며 여가 시간에는 대부분 보태니컬아트 작업을 합니다.
틈틈이 식물 식구들을 돌보면서요. 이렇게 보니 요즘 제 일상은 온통 ‘식물’과 연결되어 있네요.
보태니컬 아트는 botanical(식물의, 식물학의) + Art(예술)로 식물학과 예술이 결합된 장르를 말해요.
우리가 식물도감에서 볼 수 있는 식물화에서 출발했는데, 해외에서는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식물 세밀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만 ‘세밀’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데, 꼭 이 표현을 써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답니다.
세밀하다는 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꼭 전문적인 그림이어야만 세밀한 것도 아니니까요.
식물세밀화(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이 식물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식물 그림이라면
보태니컬아트는 조금 더 개념을 확장해서 식물의 구조와 형태를 관찰하여 이해한 걸
바탕으로 작가만의 시선과 감성을 더해서 예술적으로 풀어낸 식물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물은 제 곁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소재예요.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리고 이파리를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또 지는 마지막 모습까지, 순간순간이 경이롭고 아름다워요. 마치 사람처럼요.
예전에 청소년 보호시설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이 얼마나
큰 밑거름이 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저 역시 아이들의 말과 행동이 때때로 마음에 울려 힘들 때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더라고요.
그런 순간들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기록해두고 싶었어요. 소중하게 간직해두고픈 마음에 쓰고 그리기 시작했고
식물도 그런 관점에서 그리려고 노력해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말 식물의 순간들, 우리의 시선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식물을 찾고 관찰하고 기록하려고 해요.
식물을 그리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제가 살던 원룸의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식물 키우기를 꺼렸거든요.
그러다 퇴사하면서 화분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너무 잘 자라주는 거예요. 난 정말 별로 한 게 없는데 알아서 잘 커 줘서 기특했어요.
물론 우연히 제 방의 환경과 식물이 딱 들어맞았을 수도 있죠. 그게 줄리아 페페로미아예요.
이제 막 시작한 초보식물집사라 즐기는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식물을 즐겁게 배우고 알아가고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초록이들 컨디션을 먼저 살피게 돼요. 눈곱도 떼지 않은 채 베란다로 나가서 밤새 잘 지냈는지 오늘 물을
주어야 하는 녀석은 누구인지 한참을 살펴요. 아직은 식물을 다루는 게 조심스럽고 어렵지만, 식물을 어루만지는 제 모습이 좋아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 길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들풀과 들꽃
극히 일부만 알던 식물의 또 다른 모습들. 예를 들면 열매채소가 꽃을 피웠을 때의 모습이라든지요.
다듬어지고 갖추어진 식물도 아름답지만, 아파트 화단이나 동네 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꽃과 풀도 충분히 아름답답니다.
또 나만의 베란다 정원에서 만나는 식물들도요. 발걸음이 닿는 곳곳에 식물이 가득하잖아요. 그곳이 모두 나만의 식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른들이 왜 그렇게 시간을 내어 자연을 찾아가는지, 왜 그렇게 꽃과 나무 사진을 찍으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너무 공감해요.
삶이 풍요로워지거든요. 무엇보다 하루하루 일상에 치여 정신없이 살 때는 잊고 살았던 걸 자연 속에서 다시금 배우고 찾게 되는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억지로 꾸미지 않고 계절을 걸어가는 법을요.